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제2공화국 (문단 편집) === 긍정 === 제2공화국 정부는 다양한 정파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뭔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었고 이 다양한 정파 중에서는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와 마누엘 아사냐, [[사회노동당(스페인)|사회노동당]] 당수로서 민주적 과정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며 카바예로의 파벌과 대립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당시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인 유이스 콤파니스[* 콤파니스가 내전 발발 이전 기성 온건 우파 성향의 카탈루냐 부르주아, 급진 좌익 노조세력 사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전형적인 정치 협잡꾼 모략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정치에서 법외 수단이 아닌 정치 모략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같은 진실성 있는 민주주의자들도 충분히 있었다.[* CNT/POUM와의 타협은 실질적 권력을 쿠데타 막은 CNT가 있는 상태에서 본인은 최소한 기존 '정부'의 명함이라곤 유지하겠다고 손잡은 것이다. 쿠데타군을 공화국의 정규 군대, 경찰이 아니라 독립 무장 노조가 몰아내고 시를 점령한 상황에서 콤파니스가 협력 안한다고 뻣대면 내전이 일어날 거고 콤파니스도 CNT가 당시 상황에선 가장 주도적이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좌파, 공화파 세력을 다 쓸어버리고 진짜 권력을 독점하기엔 본인들 이념적 모순도 있고, 그만큼의 세력은 안된다는걸 통찰하고 일부러 두루티, 올리베르를 초청하여 "오늘의 승자는 댁들이오, 도시의 통치권은 당신들에게 있소" 같은 드립을 치며 권력을 '넘겨주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이렇게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많은 지방 정부 수반이 아니키스트 혁명가들에게 숙여 드가는척 하면서 보존했던 '국가'의 서류상 존재는 37년 넘어가면서 공화국 정부가 다시 내부 통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공화국 체제를 공공연히 뒤집고자 했던 극우 파시스트 국민 진영이나 [[프랑코 정권]]보다는 훨씬 나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이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불안정은 사실 전간기 유럽 국가 치고 영국 빼고 내전을 우려할 만큼 정치적 테러와 극단주의, 이념적 증오가 팽배하지 않았던 나라가 없었고 영국도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그 의회 자유민주주의의 고향인 영국, 미국의 정치적 상황도 [[대공황]]의 그늘아래 [[오스왈드 모슬리]], [[KKK]] 같은 각종 극단주의적 정치 집단이나 [[휴이 롱]] 같은 선동가들이 판치며 극심한 정치적 불안을 겪던 시대였다. 이런 세계적 측면을 고려할 때 프랑코 정권이 처음 발제하고 현대 스페인의 보수 우익이 계승한 스페인 제2공화국은 이러나 저러나 망할 수밖에 없었던 예정된 실패였다는 관점은 스페인 사회 내부적으론 실제로 보수우익이 저지른 쿠데타와 내전, 독재, 학살에 대한 사후 자기변명적 성격이 짙고, 외부의 시각에선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좌파, 그 중에서도 카바예로[* 이 사람은 CNT가 일으킨 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도 지지의사를 보내기도 했다.]와 같은 급진파들의 반교회적 개혁은 중도우파 지식인들과 평범한 민중들도 당혹시킬 정도이기는 했다. 그래도 제2공화국은 유의미한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헌정 질서에 대한 실험이었고 공화국 이념의 근대성은 우파 내에서도 내전 발생 직전까지도 받아들였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좌파 내에서는 CNT가 거의 독단적으로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을 일으켰고 라르고 카바예로같은 ''스페인의 레닌''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좌파 중에서도 비교적 중도적인 이들 대다수는 이를 부정하고 정부 진압에 협력했다. 반면 극우파 세력은 군부, 가톨릭 교회, CEDA, 알폰소 왕당파, 카를로스파, 팔랑헤 불문하고 다수의 지지를 얻어 성립된 정부[* 다만 왕당파들의 경우 정당성 면에서는 할 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왕에게 충성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은 역적패당이기 때문이다.]를 무력으로 뒤집는데 반발하지 않았다. 또한 내전 직후 장악한 쿠데타 세력에게 넘어갔던 갈리시아, 카스티야 라 비에하 같은 지방에서는 전쟁을 거의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시아의 예를 들면 내전 발생 후 5년 만에 공식적으로 처형한 것만 3천 2백명, 비공식적으로 살해한 수만 4천 명이 넘었다. 굳이 이 지역들의 통계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친프랑코 성향 인사들이 종종 가지고 오는 주된 레퍼토리가 아래 항목에서 서술된 "누가 이겨도 내전은 터졌고 좌파가 이겼으면 그만큼 심했을 것이다!"인데, 파시스트 진영이 벌인 정치적 학살이 그리 순진무구하게 '자위적 성격'이라면 애초에 내전이고 할것도 없이 거의 무혈점령한 지방에서도 수천 단위의 학살이 벌어진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 적색테러는 공화파 내부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테러를 주도한 CNT-FAI와 POUM 및 PCE 내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아사냐, 프리네토, 네그린, 디아스, 이바루리, 올리베르와 페스타냐 등의 유력 정치인들은 학살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에 비해서 백색테러는 규모와 질은 둘째치고 국민파 내부에서 반발은 커녕 오히려 정화을 더 조장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스페인 내전의 성격에 대해선 학계 내에선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으나 대중에선 그렇지 않다.[* 원문: "hay bastante más consenso sobre la Guerra Civil de lo que se piensa, pero no así en la sociedad.] >----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 역사학 교수 앙헬 비냐스[[https://www.elconfidencial.com/cultura/2021-03-14/angel-vinas_2988951/|*]] 스페인의 현대사에서 제2공화국과 프랑코 정권의 관계를 '쿠데타와 그로 인해 중단된 민주주의'로 보는 데에는 거의 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져왔다. 기존 학계 내에서 스페인 내전의 해석에 대해 가장 우파적인 자세를 취하는 스텐리 페인, 줄리어스 루이즈[* Juilus Ruiz, 에딘버러 대학 역사학과로 재직 중이고 스페인계지만 영국에서 나고 자란 영국 시민이기 때문에 영어식으로 표기한다.] 같은 학자들이 그나마 인민 전선도 알고 보면 나쁜 짓 많이 했다 정도의 수준에서나 반박한다. 현재 활동하는 학자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골적으로 친프랑코 사관을 주장하는 피오 모아 같은 경우 학계의 야인[* 폴 프레스턴같이 전통적인 사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사역사학자 취급을 하는 반면, 스탠리 페인같은 수정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고평가받았다. 스페인의 과거사에 관련한 이러한 전통주의 vs 수정주의 논쟁은 스페인 국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망라해 거의 전세계레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피오 모아는 프랑코 사망 즈음에는 스페인 공산당 소속 민병대원이었다가 우파로 전향했다. 한 때는 우파와 폭력 충돌도 벌였던 적이 있었다고.]이고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 같은 극우파 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이 살아있을 때나 정권의 공식 사관 역할을 했지 민주화 이후에는 남아 있는 프랑코 추종자들 상대로만 글쓰고 팔아 먹는 자기들만의 리그다. 사회적 기반 측면에선 아무리 민주주의적 절차가 난항을 겪었다 한들 1930년대는 민주주의란 제도 자체가 성숙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시대적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 제2공화국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이었던 민주 정부는 아니었다. 공화 진영과 쿠데타군 양쪽 모두 현대 민주주의와 관계 먼 인간들도 많았지만, 전자의 경우 반대로 정치적 테러, 물리력을 통한 헌정 질서 위협 같은 근본적인 방법론 면에서 진실성있는 민주주의자들의 영향력도 강했기에 34년 좌파만의 독단적인 무장 봉기는 아스투리아스의 CNT와 UGT 좌파만의 지역적 반란으로 끝난 반면, 우파의 36년 쿠데타는 전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좌파와 인민전선 진영의 통합성이 너무 약했다거나 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은 능력의 문제지 도덕, 명분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누가 선빵 때렸냐'''라는 문제를 무시하고 '알고보니 이만큼 공화파도 못한거 많더라'라는 논리를 펴는 것은 쿠데타 진영의 원죄를 은폐하는 주장이다. 권위주의적이라는 스탈린주의자 스페인 공산당이 전쟁 중간에 막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제2공화국이 처음부터 망할 것이 예정되었기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구국의 쿠데타' 사관의 본질은 피해자 탓하기에 불과하다. 공산당이 권력을 얻어가는 과정을 구축한 것은 국민진영이 일으킨 내전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프랑코 정권의 개국공신이자 친척이며 권력 2-3위를 왔다갔다한 라몬 수녜르만 하더라도 프랑코가 죽은 후 쓴 회고록에서 승전 이후 정권의 숙청, 테러, 보복 원칙은 "사법 정의를 머리부터 거꾸로 뒤집으며 ("justicia al reves")" 의도적으로 오히려 당시의 '관군'을 '반란군' 취급하는게 국민진영과 프랑코 정권 초기의 사법 정책이었다고 근본적인 프랑코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바가 있다. 실제로 집행 과정에서 아예 형식적인 법적 절차도 생략하고 그냥 막무가지로 총살한 경우를 제외하고 프랑코 정권 아래 법원에서 '사법처리'된 구 공화파 정치범, 포로들은 전부 '''군사 반란죄'''란 국가군 본인들이 저지른 죄명 아래 처벌되었다. 즉, 정상적인 국가의 적법성, 정통성 논리에선 도저히 답이 안나오니 프랑코 정권의 지도자들은 아예 마치 스페인 주류 보수 우파도 공화정 체제를 인정했던 1931-36년 사이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양 스페인 국체의 주권은 당대 실존했던 의회 정치, 민주 정권, 민의 등등이 아니라 프랑코주의자 본인들에게만 통하며, 개념 자체도 지극히 봉건적인 가톨릭 교회, 에스파냐 군주정으로만 설정하고 마치 공화정의 존재 자체가 스페인 민족에 대한 반역이었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코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내전 당시 공화파가 "제 2의 [[레콘키스타]]를 주장하는 양반들이 바로 그 [[무어인]] 용병들을 대리고와서 스페인 민중을 쳐죽이는 작태가 어딨냐"가 항변하니 끌고 온게 악명높은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의 '좌익은 유전병이고 따라서 [[비국민]]' 이론이다. 애초에 본인들도 막상 민주주의란 정치의 장에선 아무리 두들겨패도 대중 장악력에서 좌익에 비해 떨어지는 현실을 마주하기 전까진 카를리스타 같은 아예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우익 내 소수파 원리주의자들 제외하곤 주류 우익들도 받아들였던 공화국 헌정을 뒤집는덴 결국 이런 지극히 파시스트스러운 궁색하기 짝이 없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관점에선 씨알도 안먹히는 논리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마누엘 프라가 사후 스페인 정계 내에서 프랑코 정권의 입장을 대표하는 후계 세력도 안 생기고, 현대 스페인 주류 보수 우익은 아예 이 주제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정권간의 차이점을 비교하자면 제 2공화국 정부와 인민전선 내각은 오히려 아스투리아스, 카사스 비에하스 같은 사건에서 주로 CNT, 혹은 라르고 카바예로 계열 UGT 급진파 과격파에게 제동을 걸으며 우파 진영과도 협상을 하려고 했던반면, 쿠데타군 연합 국민전선은 '''본인들도 상당히 극심한 내부적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민주주의, 단일 종교 교권주의가 핵심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권'''이란 점이 핵심적인 차이이다. [* 다만 레데스마 라모스등의 급진적 좌파 [[팔랑헤]]출신들은 이러한 국민전선의 계급협동적, 교권적, 비직접민주적 행태에 화가나 탈당하는 일도 있었다. JONS(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가 대표적인 예시.] 극우파의 쿠데타와 파시스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서방 각국은 프랑코의 승리가 절대적이었던 1939년 2월 전까지도 공화국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1936년 대선 당시에 CEDA의 기권에도 불구하고 PRR, PCR 등의 공화주의 우파 정당은 인민전선-마누엘 아사냐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했다.[* 다만 PPR은 물러나는 니세토 알칼라사모라의 정당이라 기권(사실상 반대)했다.] 쿠데타 당시와 이후에도 미겔 마우라[* 보수공화당(PCR)의 대표] 같은 사람은 공화국을 지지했다.[* 쿠데타 직후 아사냐는 원래 마우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해서 우파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폭동 협박으로(대충 케렌스키처럼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이다) 그 계획을 포기하고 마르티네스 바리오를 총리로 임명해서 몰라와의 협상을 하게 한다.] 다만 알레한드로 레룩스[* 아마 레룩스는 그저 1936년 쿠데타가 흔한 프로눈시아미엔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코 독재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억압적이고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사실 이건 당시 쿠데타를 이끈 몰라를 포함한 군부와 관계가 있다. 다른 세력과 달리 막상 군부는 처음부터 왕정 복고를 외치거나 제2공화국 체제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냥 일단 닥치고 들고 일어나는 것만 생각해서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몰라 본인은 케이포 데 야노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아도 일단은 공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였고 다름아닌 바지사장인 카바네야스가 레룩스의 급진공화당 출신이었다. 공화정 삼색기를 부정하고 왕정제 깃발을 쓰거나 공화국 깃발인 리에고 찬가 대신 국왕 행진곡을 쓰게 된 것은 프랑코가 국민전선의 확고부동한 1인자 자리에 오르고나서부터의 일이다.]가 초기에 쿠데타를 찬양하는 등 공화주의 우파 세력은 공화국 지지에 대한 명확한 일관성은 없었다. 알칼라사모라 역시 인민전선 민병대에 의해서 집이 털리자 해외에 그대로 있었다. 미겔 마우라 같은 경우는 아나키스트들이 살해하려는 것을 프리에토가 보호한 이후로는 네그린이 제시한 평화협정 13조를 지지하는 등 끝까지 공화정부 편에 섰다. 그 외에도 레룩스나 알칼라사모라, 심지어 힐 로블레스조차 프랑코 체제를 거부해서 망명을 떠났다. 총선 당시의 총리였던 바야다레스 역시 공화파를 지지했다. CEDA 내의 일부 중도우파 정치인들도 공화정부의 편에 있었으며, 쿠데타 당시 프리에토 등의 중도좌파 정치인들과 좌우 연립정부를 세우려고 했었다. 즉 중도우파 내부에서도 상당수는 공화국을 지지했으며, 2차대전처럼 극우와 극좌+자유민주주의(중도좌우파 포함)의 대결로 봐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